[스크랩] 입학사정관제, 희망과 절망의 변주(신창호교수)
2010년 1월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이며, 신창호교수님의 홈페이지에서 복사하여 올린 것입니다.
입학사정관제, 희망과 절망의 변주
신 창 호(고려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Ⅰ. 입학사정관제를 보는 관점
몇 년 전부터 입학사정관제(이하 “사정관제”)에 대한 논의가 다양한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더니 2-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사정관제 실시에 대한 찬반 논란이 가열되었다. 교육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현재 여기저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정관제 실시에 관한 찬반 논란은 비생산적이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찬반 논란 자체가 ‘공교육 정상화’나 ‘사교육 절감’이라는 정치적-교육정책적-시각에서 논의되기 때문이다. 사정관제는 무엇보다도 교육을 무게중심에 두고 이해되어야 한다. 일부 정치 세력의 정치 경제적 논리에만 휩쓸린다면, 그것은 예고된 희생을 강요하는 절망적 제도로 전락한다. 중등교육의 현장에서는 사정관제에 대해 오리무중의 상태에서 긴장하고 있는데, 일선 현장보다는 한 발짝 뒤에 있는 존재들이 먼저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제도는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시대 상황에 따라 제도가 바뀌는 현상은 지극히 당연하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활력 있게 만들 수 있느냐이다.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제도라면 그것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주지하다시피, 사정관제는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입시가 교과 성적, 대학수학능력시험, 논술고사 등 지나치게 지식 중심의 성적 위주로 이루어지는 데 대한 비판과 함께 대안으로 제시된 제도이다. 이런 취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의 정책 전반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강조하면 사정관제는 앞서 언급한 지식중심의 성적에 의한 줄 세우기 입학시스템으로 발생하는 부정적 요인들을 해소할 있다는 희망적 발상에 힘입어 과감히 도입되었다. 그러기에 교과부나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사정관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사정관 선도대학 지원에서 양성‧훈련프로그램 지원에 이르기까지, 이 제도가 교육 정책의 기둥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사정관제 전형은 우리 교육의 장밋빛 미래로 환영이 되어 돌아온다. 대통령의 교육적 의지나 교과부의 정책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사정관제는 미래 선진형 입시의 전형적 제도처럼 여겨진다. 4년제 대학은 물론 2년제 대학, 외국어고를 비롯한 일부 고등학교에서도 사정관제로 학생을 선발하겠다고 공공연히 나서고 있으니, 얼핏 보면 아주 당연한 미래 지향적 제도로 자리매김 될 법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 문화와 대입정책 및 입시의 특성 상, 그렇게 될 것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개인적 대답도 잠시 유보한다.
분명한 사실은 사정관제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여, 아직 그 결과가 제대로 도출되지 않은, 일종의 ‘혼돈(混沌)’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정관제의 다양한 내용 중 어떤 부분도 적확(的確)하게 지적하여 말할 수 없다. 이런 시점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적극적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려고 하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제도 자체를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내가 보기에, 양 극단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은 상당히 어리석다. 사정관제는 이미 시행되었다. 민주적 의식에 투철하다면, 사정관제를 적극 추진하려는 사람들은 그것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보다는 하나의 대안임을 고려하여, 그 제도가 지닌 약점이나 단점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대로 사정관제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제도에 대한 건설적 비판과 시행의 결과 부작용을 점검해가며 점진적 폐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두 관점은 교육실천의 관점에서나 정책시행의 차원에서, 일종의 낭비다. 물론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혹은 향후 교육 정책의 기조나 정책의 구현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에 얽매인 목소리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진정 우리 교육의 건강을 지속하는 활력소이기를 열망한다.
사정관제의 희망과 절망을 보기에 앞서 나 자신의 입장을 간략하게 밝힐 필요가 있겠다. 나는 사정관제 자체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는다. 사정관제가 시대정신에 어울리게 공교육을 진일보시키고 사교육 경감의 한 방안이 될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선뜻 찬성하기에는 고려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우선, 한국의 모든 대학에서 사정관제 입시를 실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현재, 교과부나 대교협에서 사정관제를 언급할 때, 모든 대학이 사정관제를 실시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교과부나 대교협의 입장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정책을 시행하는, 소위 ‘권력’을 가지고 관리․감독하는 주체들의 분위기이다. 현재, 교과부나 대교협은 대입자율화의 1단계 조치로 사정관제도가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주요 대학에 막대한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의도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일정 기간 재정지원이 이루어진 이후, 2013년 대입완전자율화가 이루어진 후이다. 정책 시행의 주역들은 자연스럽게 사정관제가 정착될 것을 고려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로 보고 싶다. ‘대입자율화’라는 화두를 붙잡고 있는 대학이 어떤 조치를 취할까? 아직은 혼돈이다. 정원에 대비해 볼 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인원을 사정관제로 선발하는 대학의 경우, 미래에 대한 다양한 고려를 하지 않을까? 사정관제를 정착시킬지, 대입자율화이므로 사정관제를 버릴지, 어떤 속단도 하기 어렵다. 여기에 현실적 딜레마가 있다.
나는 판단한다. 아니 확신에 가까울 정도로 예견한다. 대입자율화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모든 대학이 사정관제에 의한 입시를 실시할 수 없다. 실시할 필요도 없다. 아니 실시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다양하다. 대학은 구체적으로 자기 대학에서 공부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려고 한다. 그리고 각 대학마다 교육이념과 목표, 장점과 특성을 살려 교육하고, 지도성을 갖춘 인재를 배출하려고 노력한다. 때문에 어떤 대학은 인재 선발의 과정에서 사정관제 입시가 중요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학은 사정관제를 통한 입시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입학 정원 미달로 우수 학생 사정(査定)보다는 학생 모집에 급급하여, 그야말로 사정(辭呈)할 수도 있다. 때로는 사정관제에서 내세우는 다양한 평가자료보다는 국가에서 시행하는 수능시험에 신뢰를 보내고, 그것을 선발의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이제 사정관제로 입시도 치러보았고, 여러 가지 긍정적․부정적 성과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사정관제가 우리의 교육문화에서 어느 정도 유효한지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고민이다. 우리나라 입시에서 사정관제도는 어떤 교육적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신명나는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 해볼 만한 입시제도의 한 유형인가? 우리에게 적절한 사정관제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적어도 다양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정관제를 고려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들을 전제로 사정관제를 성찰할 때, 나는 사정관제 정책 시행 과정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유감을 지니고 있다.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간략하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정관제를 도입하는 취지가 ‘공교육 정상화’ 혹은 ‘사교육 경감’이라는 중층적 테마이다.
둘째, 사정관제가 ‘대입자율화’의 단계적 조치 중, 첫 번째로 권고한 입시제도라는 점이다.
셋째, 사정관제에서 선발의 핵심이 교과 성적보다는 비교과 영역의 다양한 활동이 중요하게 평가된다는 표현이다.
발표자는 이 세 가지 영역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올바른 이해와 인식이 사정관제의 성패를 가를 수 있다고 판단한다.
Ⅱ.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 경감 방안으로서 사정관제
교과부는 사정관제 실시의 핵심 이유로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 경감 방안’을 제시한다. 나는 이런 생각에 대단히 회의적이다. 생각이 깊어질 때는 왜 이렇게 비교육적 발상을 하는지 화가 난다. ‘공교육 붕괴’나 ‘사교육의 비대화’, ‘과외 망국병’과 같은 교육문화나 현상들을 떠올리면, ‘공교육 정상화’나 ‘사교육 경감’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매력적이다. 그러나 교육정책 입안하는 자들이 교육의 진정한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 교육을 너무나 폄하하는 것 같아, 교육학자로서 아쉬움이 많다. ‘공교육 정상화’라는 언표 자체가 우리 것에 대한 자신이 없는, 외세 의존적이고 나약한 무력감에서 생겨난다고 판단한다.
예컨대, ‘공교육 정상화’를 외친다고 하자. ‘정상화’가 무엇인가? ‘정상’라는 말은 언어적으로 ‘비정상’을 전제로 거론되는 표현이다. ‘정상화’는 우리의 공교육이 ‘비정상’이기에 ‘정상’으로 바꾸자는 의미이다. 우리 교육이 어떤 차원에서 ‘비정상’적인가? 물론 ‘교실 붕괴’를 비롯하여, ‘인성교육의 부재’, ‘청소년 비행’ 등 이전에 없던 현상들이 최근에 발생하여 새로운 교육 문제로 대두한 것이 많다. 이런 현상은 21세기,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시대상황의 반영인 동시에 사회 변화와 맞물려 있는 것이지, 교육 자체가 비정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정상’에 대한 ‘정상’화라는 표현은 내가 보기에 매우 비교육적 언표이다.
정말 우리 사회는 교육 ‘정상화’를 논의할 만큼 교육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는가? 언제 교육적 소통의 시간을 가져보았는가? 물론 각계각층에서 교육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논의해왔고, 지금도 논의하고 있기는 하다. 정상화를 구가하는 사람들은 어떤 수준일까? 많은 교육자들이 묵묵하게 교육에 임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의 고충을 경청하고 실태를 파악하여 반영하기보다는 목소리 좀 큰 사람들이 자신의 잣대로 교육을 재단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인류학의 기본 준칙에 그 민족과 부족의 잣대로 그들을 보라는 말이 있듯이, 실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분들의 잣대로, 그들의 눈으로 교육 정상화를 고려하면 좋으련만.
물론 우리 교육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중등교육은 현장에서 자기의 책무성을 고민하고 있다. 학교는 학교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나름의 역할을 하며, 교육과 학습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을 비롯하여 몇몇 힘 있는 여론 집단들은, 모든 학교가 그렇게 처해 있는 사실인 것처럼 ‘공교육 비정상’을 외친다. 그리고 학교와 교사는 이 사회와 학부모 앞에 죄인처럼 인식하고 비판받기 일쑤다. 대신, 학교를 긍정적으로, 교사를 참스승으로, 학생을 사회의 동량으로 인정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앞장서는 데는 매우 인색하다. 혹시, 사교육이 비대해지고, 학교교육에서의 지식 전수가 학원과 과외로 자리 이동한 것을 학교 붕괴로 보는 일부 정치인들의 비교육적 논리에 휩싸여, 공교육 정상화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아닐까?
학교생활에서 교과 지식의 전수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학교활동을 통해 친구를 만나고, 사제관계를 맺고,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확보한다. 그런데 공교육 정상화란 이름하에 사교육의 팽창을 둔화시키거나 사교육비 경감 방안의 제도적 대안으로 사정관제를 고려했다면, 이는 엄청난 넌센스다.
더구나 우리의 중등교육은 대학입학전형인 사정관제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고교교육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정관제는 대학의 선발 정책이다. 중등교육 자체의 정상화를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중등교육은 기본적으로 그것을 담당하거나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 학교-교사-학생-학부모 등 교육 주체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사정관제의 실시로 중등교육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중등교육의 발전과 진보는 그것을 담당하는 주체들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왜 고등학교 교육을 대학이 담보해야 하는가? 고등학교는 그들의 설립이념과 교육목표에 따라 교육해야 한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각 대학의 교육이념과 방침에 적합한 인재를 선발하고 그들을 교육하여 훌륭한 지도급 인사로 양성하는 것이 본분이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사정관제를 통해 고교교육의 정상화라는 발상이 교육적으로 충분한 명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의 사정관제가 고교교육에 큰 영향력을 미쳐 고교교육이 또 다시 사정관제라는 입시전형을 준비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또 다른 형태의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일이다. 이렇게 된다면 고등학교는 새로운 형태의 입시제도를 준비하는 기관으로 전락한다.
사교육비 경감과 관련하여 항간에서는 부정적 의견도 만만치 않다. 사정관제의 도입으로 사교육을 더 부추긴다고 난리다. 사정관제를 위한 학원이나 상담센터가 더욱 번성하여 사교육의 번창을 가져올 것으로 예측한다. 어떤 입시학원에서는 이미 사정관제 대비라는 커다란 문구를 써 붙이고 영업을 시작한 곳도 적지 않다. 모 대학 사정관을 지냈던 사람을 스카우트 하여 사정관제 입시를 완벽하게 대비할 수 있다고 소문내는 곳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학생들이 ‘내신-수능-논술’이라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에서 입시에 허덕이고 있는데, 사정관제 대비까지 하라니! 학생을 두 번 세 번 고통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현상은 사정관제 반대론자들에게 잘 들어맞는다. 그들이 보기에 이런 사회적 상황은 철저하게 입시부담을 가중시키는 비교육적 정책이기에 절대 반대, 혹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달리한다. 단기적으로 볼 때, 사정관제도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될 때까지는 사정관제 입시를 대비한 사교육이 번창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사정관제가 제대로 정착된다면, 정착 이후에는 사정관제가 지닌 특성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공교육이 진일보한 형태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고교 교육과정에서 교육과정이 선진형으로 바뀌고 다양한 비교과 활동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며,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즐기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대학입시로 연결될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교육에서 비교과 영역의 과외를 따로 담당할 이유가 없다. 이런 점에서는 정책입안자들과 동일한 생각일 수는 있으나, 그것은 정책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교육주체들의 의식이 시대정신에 맞게 거듭날 때 가능하다!
다시 ‘공교육 정상화’라는 표현으로 돌아가자. 사실 공교육은 서구의 근대 학교제도의 발달과 더불어 탄생하는 근대적 개념이다. 그것은 의무교육이나 보통교육, 시민교육 등과 맞닿아 있다. 그러기에 인간이 빚어내는 시간과 학교라는 공간 사이의 긴장을 적절하게 연결한다. 거기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교육문화다. 때문에 학교-공교육은 국가와 자치단체, 학교, 교사와 학생, 학부모 등 교육의 주체들이 만들어가는 하나의 교육 문화로 존재할 뿐,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어 볼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인식과 실천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 공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고칠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고치는 것이 효과적인가? 즉 시대정신에 맞게 ‘공교육의 선진화’, 혹은 공교육의 진보’를 꿈꿔야 한다.
그런데 ‘공교육의 정상화’란 구호를 앞세워 버리면, 우리 스스로 우리 교육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현재 비정상적인 공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사명이다! 이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자괴감으로 빠트리는 사고이다. 그렇다보니 진정한 성찰을 하기도 전에 다른 나라(특히 미국)의 제도에 눈을 돌리고, 건국 이후, 가난한 나라에서 잘 사는 나라로 올라서는 데 나름대로 기여한 우리의 교육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한국교육의 정체성 상실을 경험한다.
21세기 현재, 외국의 어떤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교육 양식을 본받으려고 난리이다. 우수한 교육의 모델로서 우리의 공교육을 고려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를 ‘비정상’으로 몰고 가야하는지, 나는 의아하다. 우리는 현재 우리 교육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을 좀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고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인식하에서 고등학교 교육의 진보와 한국적 대입전형제도를 고민하면서, 필요하다면 한국형 사정관제를 요청해야 한다. 이는 가까운 미래에 교육적 진정성을 가지고 성찰해야 한다.
Ⅲ. 대입자율화의 첫 번째 방안으로 제시된 입학사정관제
대학입시와 관련하여 고려해야 할 것은 사정관제가 대입자율화의 과정에서 도입된 것이라는 점이다. 10여 년 전(1998)에 수행된 「교육부 정책연구보고서」에서는 대학입시와 관련하여 주요한 사안을 지적했다.
“국가는 대학의 학생선발과정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고민이 나온 배경에는, 그 동안 국가가 입시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입시경쟁의 폐단이 심화되고, 학부모(학생)들에게 막대한 재정적ㆍ정신적 비용을 부과하여 고통을 주었다는 반성 때문이다. 이후 10년 만인 2008년 1월 대입자율화가 전격 추진되었다. 이는 국가가 개입하던 대입전형의 문제를 대학에 돌려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대학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정당한 조치를 하였다는 데서 의미가 크다.
사정관제는 이런 정부의 정책에 근거하여, 대학입시를 대학의 권한과 책임에 맡기려고 하는 대입자율화의 큰 틀 속에서 도입되었다. 즉 아래 <표 1>에서 보는 것처럼, 대입자율화 3단계 조치 중, 1단계에서 운용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표 1> 대입자율화 3단계의 주요 내용
1단계 - 2009학년도부터 학생부 및 수능반영 자율화 - 현재의 등급제 폐지, 수능성적을 표준점수와 백분위 성적으로 제공 - 정부의 입학사정관제도 지원 - 2008년에 대입업무를 대교협으로 이관 2단계 - 수능과목 축소 - 현재 8과목을 2013년도부터 최대 4과목 응시 - 영어는 별도 능력 평가 3단계 - 본고사 없이 자체 선발 능력 및 제도 구축 - 2012년 이후 대입제도 완전 자율화 |
다시 강조하면, 대입자율화의 관점에서 대입전형은 대학이 대학의 특성과 교육이념 등에 따라 대학이 원하는 학생을 선발하면 된다. 학생을 선발하는 주체는 대학이고, 어떤 학생을 어떤 기준에 따라 선발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개별대학이 정할 사항이다.
그런데 정부는 대입자율화 3단계를 표방하면서 ‘사정관제’를 지원한다. 물론 기존의 대학입시 문화나 정책에서 볼 때, 대입자율화를 도와주는 차원에서 정부의 지원은 고무적으로 보인다. 더구나 대교협으로 입시 업무를 이관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며, 대입자율화를 상당히 고려했다고 판단된다.
문제는 대입자율화는 대학 스스로가 알아서 하는 것이지, 다시 정부가 개입해서 권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데 있다. 대입자율화 3단계, 사정관제, 수험시험 운용의 변경 등 정부에서 추진하는 입시자율화와 관한 여러 문제들은 어떤 차원에서는 또 다른 통제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대입자율화와 정면 배치된다. 대입자율화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3불 정책과 같은 최저 기준이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대학이 그것을 참조하여 자발적으로 자체 정책을 수립하고 인재를 선발을 할 수 있도록 선발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대입자율화에서는 ‘자율화’라는 대전제가 우선이다. 아무리 사정관제가 장점이 많고, 정부가 지원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 제도의 도입을 대입자율화의 전제로 내세우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사정관제를 대입자율화라는 범주에 편입시킬 때, 그것은 입학전형의 다양한 방법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입시는, 마치 사정관제도가 미래의 대입자율화를 담보하고, 모든 대학이 이를 통해 입시를 치러야할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는 듯하다.
사실, 대입자율화를 화두로 제시했다면, 다양한 입시전형의 방식을 안내하는 것이 옳다. 현재의 3불 정책을 준수하면서, 어떤 대학은 사정관제를 도입할 수도 있고, 어떤 대학은 수능시험으로 선발할 수도 있으며, 어떤 대학은 논술을 볼 수도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면접만으로 선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정관제가 입시의 모든 것처럼 느껴지도록 강조되는가?-다시 말하지만, 의도는 그렇지 않음을 안다. 교과부에서 지시하는(?) 정책이 모든 대학에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설득력 있는 작업이 요청된다.
Ⅳ. 사정관제는 교과 성적보다는 비교과 활동이 중요하다는 오해
사정관제에서 선발의 핵심이 교과 성적보다는 비교과와 영역의 다양한 활동을 중시한다는 표현이다. 학부모들은 헷갈린다. “교과 성적보다는 비교과 활동이 중시되고, 면접을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 그런 의도는 아니겠지만, 국가 최고지도자로부터 여러 지도층 인사들이 이와 유사한 발언을 해버리면, 많은 사람들은 “아 이제 교과목 공부, 학생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지식 중심의 입시 공부, 사교육 등을 안 해도 대학을 갈 수 있다”라는 착각을 양산한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교과 공부나 성적은 매우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대학이 고등교육기관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대학은 초등학교나 중학교처럼 의무교육 기관이 아니다. 고등학교처럼 보통교육 기관도 아니다. 한국에서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이 짧은 기간에 엄청난 양적 팽창을 하다 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른바 고등교육, 대학교육의 대중화 시대이다. 급격한 팽창은 다양한 부작용도 가져 왔다. 어떤 대학은 정원 미달 사태를 빚고, 심한 경우, 대학이 존폐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지방의 국공립대학도 구조조정과 통폐합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국민들이 대학은 아무나 가는 것으로 혼돈을 겪고 있다. 물론 현재 상태라면, 산술적으로 대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대부분의 고교 졸업자들이 입학할 수 있다. 모두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데, 왜 대학입시가 이렇게 난리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른 바 명문대학(아니면 그래도 어느 정도 위상이 있는 대학)을 고집하는 데서 빚어진다. 사정관제도가 입시에서 논란의 핵심이 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대학은 고등교육기관이다. 이른바 ‘고등(高等)’교육이라는 의미 속에는, 단순한 일반 시민,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도급 인사를 길러낸다는 의미를 함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학의 교육은 상당한 수준의 교양과 지식을 함양하는 데 목적이 있다. 대학입학 전에 국가 수준의 평가를 ‘대입수학능력시험’, 이른 바 ‘수능’시험이라고 명명하듯이, 대학생은 대학교에서 ‘수학(修學)’할 수 있는 ‘능력(能力)’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대학입시에서 기본이며, 각 대학마다 요구하는 수준이 다르다. 어떤 대학은 수능 ○등급 이상을, 어떤 대학은 ○등급 이상을 등등.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학부나 학과, 전형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기준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대학마다 요구하는 수학 능력을 위한 기본 성적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학이 자신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정관제를 도입하면서, 교과 성적보다는 비교과 영역의 점수가 중요하고, 그것의 영향력이 학업성적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는 이미지는 사정관제가 오해를 받기에 충분하다. 아울러 성적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극단적 곡해에 이르게 되면, 이제는 드디어 사교육이 필요하지 않고, 학교교육을 정상적으로 이수하면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대학입학의 환상에 빠지게 된다.
교과 성적 문제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다시 정돈하면, 사정관제에 의한 선발에서, 성적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은 사정관제뿐만 아니라 모든 입시의 기본이자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요소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 철저하게 인식해야 할 것! 그것은 어떤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는 기초 학력을 갖추는 일이다! 사정관들이 선발하는 일반전형의 경우, 비슷한 교과 성적을 지닌 학생들이 경쟁할 경우, 비교과 활동 평가의 반영 정도에 따라 합격 여부가 판가름 날 수 있다. 즉교과 성적이 높더라도 비교과활동이 상대적으로 미흡할 경우, 탈락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나 특별한 전형의 경우를 제외하고, 교과 성적이 월등히 높은 학생이 비교과 활동 평가가 약간 좋은 학생에게 떠밀려 탈락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것은 사정관제의 특성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각 대학은 제각각의 기준에 따라, 이른 바 우수한 학생-교과 성적이건 비교과 성적이건, 기타 다양한 요소를 반영하건-을 선발하여 유치하려는 전략적 노력을 강화한다. 여기에서 교과 성적을 제쳐두고 비교과 활동 영역만으로 선발한다거나, 교과 성적과 비교과 활동을 두고 사정관제 선발에서 비교우위를 논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예를 들어, 사정관들이 참여하는 어떤 전형의 경우, 전형 요소를 어떻게 개발하느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전공 영역 교과 성적 우수자를 중심으로 선발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비교과 활동 중 특별한 측면을 집중적으로 반영하는 전형도 있을 수 있으며, 지역인재, 지역균형, 사회적 약자배려, 기회균등 등 다양한 전형별 요소를 반영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고민해야할 것은, 대학에서 수학할 학업 능력을 갖추었는가? 갖추지 않았는가?이다. 그것은 교과 성적과 직결된다. 학업 성적의 문제다. 그러므로 사정관제 전형에서 교과 성적보다 비교과 활동 평가가 중요하다는 말은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말은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의 교과 성적을 갖추고, 비교과 활동 영역의 평가가 전형별 특성에 따라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라는 표현으로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다시 사교육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사정관제가 사교육을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긍정적 답변을 낼 수 없다. 대학입시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같은 국가고사, 혹은 학교 교과 성적, 기타 경시대회나 각종 자격증, 어학 능력시험의 점수 등이 반영되는 입시가 존속하는 한 국영수와 같은 사교육 시장은 그리 쉽게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별학교마다 교육환경이 다르고 개별적인 학업 특성이 다르며, 학부모들의 학업 성적에 대한 불안 심리를 잠재우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정관제를 실시한다고 하여 교과 성적과 관련하여 기존의 사교육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직 일선학교와 학부모들에게 사정관제에 대한 인지가 덜 된 상태에서, 사정관제를 대비한 사교육은 단기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사정관제의 진정성을 이해하게 된다면, 사정관제 전형은 학교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은 것으로만 충분히 평가되기 때문에, 오히려 사교육에서 도움받은 포토폴리오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Ⅳ. 사정관제 이해를 위한 여언
이제 입학사정관제는 한두 살 먹은 애기처럼 겨우 한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그것의 성공과 실패는 이제부터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여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우리에게 적절한 한국형 사정관제를 위해서는 우리 교육문화와 교육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망된다. 나는 단언한다. 현재 일본의 입학사정관제(A.O)입시나 미국형 입학사정관제도는 결코 우리의 미래 사정관 모델이 아니다. 사정관제 초기에 그들의 양식을 벤치마킹했다고 할지라도, 우리 대학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우리 옷으로 갈아 입은 사정관제로 재탄생하여야 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우리의 사정관제도를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사항만 한두 가지 언급하고 이 글을 마무리 한다.
첫째,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충분한 홍보와 올바른 인식이 요청된다. 입학사정관 전형이 이루어지기 시작한지 2-3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일선학교 교사나 학부모, 교육과 관련한 사회 곳곳의 구성원들은 사정관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사정관제가 국가에서 치르는 수능시험처럼, 내용상 모든 대학에서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기에 어떤 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A대학에서는 이렇게 시행하고, B대학에서는 저렇게 시행하니, 일선학교에서는 어디에 기준을 두고 준비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교사가 이런 인식을 하고 있는데, 학부모는 오죽하겠는가? 대학입시에서 사정관제는 사정관이라는 명칭만 같다. 대학별로 공통점을 지닌다면, 학생생활기록부를 반영하거나 비교과영역의 활동을 고려할 것이라는 점, 면접의 양식이 다양해질 것이라는 정도이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사정관제의 구체적 내용은 대학별로 전형별로 제각기 다르다!
둘째, 현재 입학사정관제는 교과부에서 권장하고 지원하여 시행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각 대학별로 자율적으로 시행하는 입시 선발 제도이다. 그것은 고교교육 전 과정을 평가하여 대학입시에 반영한다는 차원에서 보통교육에 대한 총체적 평가이다. 이 지점에서 사정관제는 대학별로, 혹은 대학 내에서도 계열별, 단과대학별, 학부별로 다양한 평가의 기준과 요소를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대학에도 국공립대가 있고 사립대가 있다. 국공립대와 사립대는 설립주체와 설립 이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사정관제의 운영 양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특수 목적을 지닌 대학-예를 들어, 과학기술대, 의과대, 사범대 등-이 있고, 다양한 학문을 지향하는 일반대학이 있다. 이 사이에도 사정관제의 운영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사정관제를 시행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사정관제라는 또 다른 입시제도의 한 형태를 받아들이면서, 적극적으로 그것에 대비하는 고교교육을 준비하는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시대정신에 맞는 고교교육을 실천하면, 저절로 사정관제를 대비하는 것이 되는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인다. 언론 보도를 보면, 입학사정관들에 대한 오해가 많다. “20대의 젊은 사정관이 경험도 없는 데 어떻게 그 중요한 입학사정관을 할 수 있느냐?” “다양한 전공과 경험의 소유자가 입학사정관을 해야 하는 데 교육학 전공자들이 사정관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정관들의 수가 터무니없이 적다. 3-4명의 사정관으로 수백 수천 명의 지원자들을 사정한다는 것 불가능하다.” 등등 비판이 많다. 그런 지적은 상당히 의미 있는 시선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정관에는 해당대학의 교수로서 전임사정관도 있고, 일정한 자격을 갖춘 석사나 박사 중에서 전임사정관으로 채용한 경우도 있으며, 교육계 관련 인사가 사정관제 자문을 할 수도 있다. 단지 채용을 통해 임용한 몇 명의 전임사정관이 학교의 모든 입학사정관제를 책임지는 것처럼 비춰져서는 안 된다.
특히, 입학사정관에 대한 오해의 극치는 사정관들이 학생을 최종 선발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일이다. 입학사정관들이 어떻게 학생을 선발하여 합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가? 입시전형의 단계에서 사정관의 특성을 핵심적으로 요약하여 말하면, ‘학생이 제출한 서류를 읽는 리더(reader)’이다. 학생생활기록부를 비롯한 다양한 제출 서류를 정확하게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그것이 사정관의 임무이다. 물론 면접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합격 여부나 최종 선발은 각 대학에서 정해진 규정과 절차에 따라서 진행한다.
아무튼 이 글을 통해,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길 소망한다. 오해를 불식하고 우리 교육의 건강이 지속되기를 희구한다. 그렇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입학사정관제는 희망과 절망의 변주 가운데 자기 연주를 하는 듯하다.
■ 입학사정의 성격 : 계통성 복원
- 대학의 입학사정은 고교 교육과정과 대학 전공교육의 연계
- 전공 목적에 따른 학력신장의 계속성
- 학생부 중심 사정
㉠ 고교 교육과정과 대학 전공교육의 연계
- 수능시험 점수 위주 선발제도 운용 → 초․중․고․대학교의 교육과정 계통성 상실
- 대학의 입학사정은 공교육 목적에 충실한 완성형 교육을 받은 아이들과 전문적 역량을 배양하는 대학 전공교육과의 교육과정적 연계를 매개하는 활동
- 상호간의 교육과정 연계 강화 → 고교 교육과정 정상 운영과 동시에 대학교육의 활성화
㉡ 학력신장의 계속성을 위한 재능 발굴
- 고교에서 획득한 학생의 학습자원은 대학의 전공교육을 통해 전문적으로 심화 개발
- 대학 전공단위는 고교 교육과정 활동을 통해 얻은 학력을 계승하여 심화된 전문 전공능력으로 신장
- 양자 간의 분극을 메우는 매개고리가 재능 발굴을 겨냥하는 입학사정행위의 제도화
㉢ 학생부중심 선발
- 입학사정에서 기본 전형자료는 학생부 → 학생부는 교육과정 활동의 과정과 결과가 기록된 공적 문서
- 입학사정은 다양한 전형자료를 읽고 그것이 선발기준에 적합한지를 따지는 사회적 행위
- 학생부(교과 및 비교과)기록, 수능성적, 자기소개서, 추천서, 학업계획서, 포트폴리오 등의 다양한 전형자료 → 종래와 같이 수능점수를 곧장 평가척도로 사용하는 방식을 떠나 수능점수도 ‘하나의’ 전형자료로 활용